본문 바로가기
유용한 내용

우리가 알고있는 갈릴레이는 희생자인가

by 가은이 2021. 6. 30.
반응형

갈릴레이는 교회의 희생자인가?

갈릴레이는 가톨릭 교회의 희생자을까 생각해보자. 게르하르트 프라우제와 같은 역사가들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면, 위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믿어온 것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의 불행 한 희생자가 결코 아니었다. 종교재판소와 벌인 그의 유명한 언쟁은 오 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궤변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고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걸쳐준 순교자라는 외투는 갈릴레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 바로 몇십 년 앞서 화형당한, 불행한 조르다노 브루노(이탈리아의 철학자로 우주의 무한성과 지동설을 주장하고, 반교회적인 범신론을 논하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했음)와는 달리 갈릴레이는 일생 동안 나라와 교회의 권력자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는 교회 측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갈릴레이의 최대 적은 속세의 동료, 즉 대학강단의 교수들이었지 교회 설교단의 수도사들이 아니었다. 갈릴레이가 50세가 넘은 나이에 비로 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된 것도 다른 물리학 교수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서이지 교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교회 측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토스카나 출신의 이 물리 학 교수를 상당히 관대하게 대했다. 갈릴레이는 교황의 영접을 받았으며 예수회의 수사들로부터는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속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실재하는 사실을 통해(즉 목성의 위성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이 과 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갈릴레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틀린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 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론이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에 대한 교회의 관대함이 진지하게 시험대 위에 올랐다.

왜냐하면 갈릴레이의 논제를 연구 가설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결정 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는 그들의 독점 적인 지위가 침해당한다고 여겼다.

 


 

갈릴레이의 고집

갈릴레이가 교회 측의 경고에도 불 구하고 고집스럽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증명된 진리라 주장하면서 도 그 증거를 내놓지 못하자(과학적 이론이란 반증은 할 수 있어도 증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은 틀 린 것이고 모든 점에서 신성한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들 나름대로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갈릴레이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그의 책은 금지되지도 않았고 권력자들과의 친분 관계도 별로 침해를 받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이때부터 자신의 논제가 이론에 불과하며 최후의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다면 종교재판에 앞서 로마로 소환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유명한 소환 사건은 갖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가 계속 적대적 진리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의 새로운 책을 펴냄으로써 일어났다.

 

소환장은 1632년 10월에 보내졌으나 갈릴레이의 병고로 연기되고 1633년 2월에 비로소 갈릴레이는 로마로 향하게 된다. 로마에서 그는 처음에 피렌체 대사의 손님으로서 메디치 저택에서 지내다가, 1633년 4월 12일부터 6월 22일까지의 종교재판 소송 기간 동안에는 바티칸 안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집에서 지냈는데 여기에는 하인과 정원이 내 다 보이는 전망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감옥에 갇히지도 안 앗고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고뇌

천재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갈릴레이도 별 재능 없는 사람들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했다. 종교재판 소송에서도 그는 무지한 추기경들이 이해 못하는 몇 가지 쟁점들을 해명하고 나면 집으 로 보내지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진리에 대해 그의 책 에 써놓은 것은 금지된 것이며 틀린 것이라는 생각을 반증할 과학적 논거를 종교재판관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게 되자, 그때서야 비로소 갈릴레이는 두려워졌다.

 

아마도 그때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를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혹은 다만 조용히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는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압력을 받지 않고서도 자신의 학설을 전부 간단하게 부인해버렸다.

 

그러고는 불복종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형벌은 3년 동안 매주 일 곱 개의 참회 시편에 금고형이 더해졌지만 갈릴레이는 한 번도 감옥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소송 후에 그는 토스카나의 대공 저택에서, 그리고 그다음엔 시에나의 대주교 집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피렌체 근 처의 아르체 트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국가연금을 받고 살았다. 그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곳에서 1642년 생을 마치게 되었다.

반응형

댓글